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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서론: 은둔과 노동의 미학
양평의 깊은 숲속, 도시의 소음이 소거된 그곳에 화가 장원실의 작업실이 있다. 현대 미술이 화려한 개념과 난해한 이론으로 무장하며 관람객을 압도하려 할 때, 장원실은 마치 구도자처럼, 혹은 아주 오래된 장인처럼 묵묵히 '물질'과 씨름한다. 그녀의 캔버스는 매끄러운 환영(Illusion)을 보여주는 창이 아니라, 거친 노동의 땀과 시간이 퇴적된 지층(Strata) 그 자체다.
장원실의 작업 여정은 지리적 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부산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2002년 양평으로 이주한 사건은 단순한 거주지의 변화를 넘어 그녀의 예술 세계를 규정하는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도시의 속도감과 단절된 채 마주한 양평의 자연은 그녀에게 관조의 시선을 허락했다. 초기 코발트 유약을 사용해 청화백자의 미감을 캔버스에 구현하던 시기를 지나, 그녀는 점차 흙, 모래, 철사, 합성수지(레진)와 같은 건축적이고 원초적인 재료에 천착하게 된다.
본 평론은 장원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기제인 '수행적 노동'과 '기억의 보존'을 분석하고자 한다. 그녀가 붓을 버리고 불에 구운 철사를 캔버스에 붙이고, 그 위에 레진을 덮은 뒤 다시 사포로 깎아내는 지난한 과정은 회화를 그리는 행위라기보다 '시간을 조각하는' 행위에 가깝다. 15페이지에 달하는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장원실이라는 작가가 어떻게 물질을 통해 비물질적인 '기억'과 '그리움'을 견고하게 구축해내는지, 그리고 그 결과물이 우리에게 어떤 치유의 메시지를 던지는지 살펴볼 것이다.
제2장. 재료의 연금술: 철사와 레진, 그리고 불
장원실의 회화를 마주했을 때 관람객이 가장 먼저 느끼는 감각은 시각보다는 '촉각'에 가깝다. 밋밋한 캔버스 위에 물감이 얹혀진 형태가 아니라, 화면 자체가 두께를 가진 부조(Relief)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창적인 마티에르(Matière)는 그녀가 선택한 독특한 재료와 공정에서 기인한다.
2.1. 불을 통과한 선(Line): 철사의 미학 일반적으로 회화에서 '선'은 붓끝에서 탄생하는 2차원의 흔적이다. 그러나 장원실에게 선은 3차원의 실체다. 그녀는 공사장에서 철근을 묶을 때 사용하는 얇은 철사를 주재료로 삼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 철사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불에 한 번 구워낸다는 사실이다. 불을 통과한 철사는 강성을 잃고 부드럽고 유연해진다. 이것은 작가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닮아 있다. 강한 것을 부드럽게 만들고, 차가운 금속에 온기를 불어넣는 과정은 그녀의 작품이 차가운 물성을 띠면서도 정서적으로는 따뜻함을 주는 이유다. 캔버스 위에 부착된 철사는 그림의 뼈대이자 신경망이 되어 작품의 견고한 구조를 형성한다.
2.2. 덮음과 깎아냄의 변증법: 퇴적과 침식 철사로 드로잉이 완료되면 그 위를 덮는 과정이 시작된다. 흙이나 모래를 섞은 재료, 그리고 레진과 안료가 철사 위를 겹겹이 덮는다. 여기서 역설이 발생한다. 작가가 공들여 만든 철사 드로잉은 불투명한 레진 층 아래로 사라진다. '그리기'가 완료되는 순간 이미지가 '매몰'되는 것이다.
하지만 장원실의 회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시 시작된다. 그녀는 굳어진 표면을 사포나 그라인더로 깎아내기 시작한다. 덮여있던 철사들이 마침내 표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작가는 깎고 또 깎는다. 이 과정은 자연계의 풍화 작용과 유사하며,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굴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흙을 털어내는 행위와 비견된다. 즉, 장원실의 회화는 '더하기(+)의 예술'이 아니라 '빼기(-)의 예술'이다. 노동의 강도가 셀수록, 더 많이 깎아낼수록 화면 속의 이미지는 더욱 선명해진다. 이 지점에서 작가의 노동은 예술적 기법을 넘어선 수행(Asceticism)의 차원으로 승화된다.
제3장. 주제 연구: '섀도 박스'와 기억의 저장소
기법이 작가의 육체적 수행을 보여준다면, '섀도 박스(Shadow Box)'라는 주제는 작가의 내면적 지향점을 보여준다. 섀도 박스는 본래 소중한 물건이나 기억하고 싶은 대상을 입체 액자 안에 넣어 보관하는 상자를 뜻한다. 장원실은 캔버스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섀도 박스로 상정한다.
3.1. 기억의 박제와 보존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상들—오래된 나무, 꽃, 혹은 이름 모를 자연의 파편들—은 단순한 풍경화의 소재가 아니다. 그것들은 작가가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순간"들의 시각적 환유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필연적으로 소멸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작가는 결코 썩지 않을 합성수지(레진) 속에 가두어 영원성을 부여한다. 마치 호박(Amber) 속에 갇힌 고대 곤충처럼, 장원실의 섀도 박스 안에서 대상들은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 영원한 현재를 살게 된다.
3.2. 자연의 은유: 나무와 숲 특히 나무는 장원실이 가장 사랑하는 소재 중 하나다. 양평 작업실 주변을 둘러싼 숲은 그녀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준다. 그녀가 그리는 나무는 매끄럽고 이상적인 형태가 아니다. 거친 표면, 옹이, 뒤틀린 가지들이 철사와 흙의 질감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섀도 박스-천년초> 등의 작품에서 보이는 나무들은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인격체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나무의 껍질을 표현하기 위해 더욱 거칠게 화면을 갈아내는데, 이는 나무가 겪어온 시간의 상처를 작가가 자신의 노동으로 어루만지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제5장. 결론: 치유와 복원의 예술
장원실의 작업은 빠름과 가벼움이 미덕이 된 디지털 시대에, '느림'과 '무거움'의 가치를 역설한다. 그녀는 10년 가까이 외부와 단절된 채 수행자처럼 자신만의 기법을 완성했다. 코발트 블루의 청화백자 유약에서 시작해, 이제는 흙과 철사, 레진이라는 이질적인 재료들을 융합하여 '오래된 시(詩)'와 같은 울림을 주는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녀의 그림 앞에 선 관객은 단순히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화면 속에 층층이 쌓아 올리고 다시 깎아낸 시간의 두께를 체험하게 된다. 그 까끌까끌한 마티에르를 눈으로 더듬으며, 우리는 작가가 보존하고자 했던 소중한 기억의 파편들을 마주한다. 화가 장원실에게 그림이란, 사라져가는 것들을 붙잡아두려는 간절한 기도이자, 상처 난 기억을 덮고 어루만져 치유하는 따뜻한 손길이다. 그녀의 '섀도 박스'는 작가 개인의 기억 상자를 넘어, 위로가 필요한 우리 모두의 안식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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